명절은 단순한 달력 속의 공휴일이 아니다. 그것은 세대와 세대를 잇는 다리이며, 시간을 꿰뚫는 문화적 기억의 결절점이다. 매년 반복되는 명절은 삶의 리듬을 정돈하고, 자연과 인간 사이의 조화로운 관계를 새롭게 확인하는 의례적 시간이기도 했다. 특히 음식은 그 문화적 기억을 구체화하는 가장 직관적인 수단이다. 음식을 만드는 방식, 올리는 절차, 나누는 태도 하나하나에 이 땅의 오랜 문화와 정신이 스며 있다.
그러나 이제 명절 음식은 ‘노동’으로 간주되며, 대체 가능한 상품처럼 취급되는 시대에 접어들었다. 떡국과 전, 송편과 나물은 더 이상 기다림과 손맛의 상징이 아니라, 구매 가능한 ‘패키지’가 되었다. 효율성과 편리함이 우선되는 현대의 삶 속에서 전통 음식은 불편한 유물처럼 밀려나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은 단지 조리법이 아니라, 조리 행위 속에 깃들어 있던 사회적 의미, 자연의 순환에 맞춘 식문화, 그리고 공동체적 기억의 방식이다.
이 글은 잊혀져 가는 전통을 음식이라는 구체적 실천을 통해 되짚어보려 한다. 송편을 빚던 손끝의 기억, 나물을 고르던 생태적 감각, 전을 부치며 전해지던 예의와 규범. 명절 음식은 단순한 ‘맛’이 아니라, 삶을 이해하고 사람과 관계 맺는 방식을 가르쳐주던 문화의 축약이었다.
송편 한 조각에 담긴 ‘손의 기억’과 여인의 자리
송편은 그 자체로 시간의 산물이다. 찹쌀가루를 반죽해 콩, 깨, 밤, 대추 등 다양한 속재료를 넣고 반달 모양으로 빚은 뒤 솔잎을 깔아 찌는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다. 이 긴 과정은 단지 음식 하나를 만드는 일이 아니라, 여성의 손끝에서 세대 간 지혜와 애정이 전해지는 하나의 사회적 의식이었다. 추석 전날, 온 집안 여성이 둘러앉아 송편을 빚던 풍경은 단순한 노동의 장면이 아니라, 공동체의 감각을 실천하던 무대였다.
이때 중요한 것은 ‘누가 어떻게 만들었느냐’이다. 반죽을 치대는 방식, 속을 넣는 순서, 떡을 빚는 모양 하나에도 집안의 전통이 녹아 있었다. 예컨대 어떤 집은 송편에 콩만을 넣었고, 어떤 집은 참깨에 꿀을 섞었다. 이러한 차이는 단지 재료의 차이가 아니라, 지역적 풍토와 가족의 정서, 조상으로부터 내려온 방식이 농축된 문화적 차별성이었다.
무엇보다도 이 과정은 ‘여성’이라는 존재가 명절의 전통을 유지하고 실천해온 주체임을 보여준다. 어머니는 딸에게, 할머니는 손녀에게 자연스럽게 송편을 빚는 기술을 가르쳤고, 그것은 단순한 요리법 전수가 아니라 삶의 태도, 예절, 공동체에 대한 책임감을 물려주는 방식이었다. 송편의 반달 모양은 달의 형상처럼 여성의 순환성과 리듬감을 상징하는 측면도 있다. 이처럼 송편은 단순히 추석의 음식이 아니라, 여성의 역할과 정체성이 문화적으로 발현되던 공간이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의 송편은 편의점과 마트에서 플라스틱 용기에 담긴 채 소비된다. 더 이상 누군가의 손끝에서 정성껏 빚어진 모양은 아니다. 그리고 함께 모여 앉아 송편을 만들며 나누던 대화, 삶의 조언, 웃음소리도 사라졌다. 음식이 빠진 것이 아니라, 그 음식을 통해 나누던 사회적 관계가 무너진 것이다. 한 조각의 송편은 잊혀진 여성의 노동과 기억의 상징이며, 그것이 사라진 자리는 고요하지만 씁쓸하다.
나물과 탕국 – 계절과 신을 연결하던 ‘생명의 접시’
명절상 위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 바로 나물이다. 산과 들에서 채취한 제철의 나물을 삶아내고, 데쳐내고, 볶아낸 후 간장이나 소금, 참기름으로 조미한 나물 반찬은 언뜻 단순해 보이지만, 사실은 깊은 생태적 감각과 신앙적 사고가 깃든 음식이다. 나물은 계절의 언어였고, 자연과 인간이 맺는 일종의 계약 같은 것이었다.
설 명절에 오르는 시금치나물, 도라지나물, 고사리나물은 겨울을 지나며 부족해진 신선한 채소를 보충하려는 생물학적 요구이기도 했고, 땅속 깊은 곳에서 겨울을 이겨낸 뿌리와 싹의 생명력을 받아들인다는 신앙적 상징이기도 했다. 나물을 많이 먹는다는 것은 그만큼 자연의 기운을 몸속에 채워 넣는 일이었고, 이는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생명’을 분양받는 방식이었다.
탕국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긴 시간 동안 뼈와 고기, 무, 대파 등을 넣고 우려낸 국물은 생명력을 농축한 음료였다. 설날 아침 이 탕국을 한술 떠 넣는 순간, 사람들은 새로운 한 해의 기운을 받아들였고, 그 국물이 지나간 속에서 병과 불운이 씻겨 나간다고 믿었다. 지방마다 레시피는 달랐지만, 공통된 요소는 ‘정화’와 ‘시작’이라는 상징성이다.
그러나 지금의 나물과 탕국은 냉장 유통과 밀키트의 형태로 재구성되어 계절성과 맥이 끊긴 채 소비된다. 이미 양념되어 있는 나물, 레토르트 방식으로 끓이기만 하면 되는 탕국은 빠르고 편리하지만, 우리가 음식을 통해 자연과 맺었던 교감은 불가능하다. 제철의 감각을 잃은 식생활은 기후에 대한 민감성을 잃게 하고, 결국 우리가 어디서 살고 있는지를 모르게 만든다.
나물은 그래서 단지 반찬이 아니라, 땅과 계절, 신과 사람 사이를 이어주는 생명의 코드였다. 그것이 사라진다는 것은 우리가 더 이상 ‘자연의 일부’로 살아가지 않는다는 선언이기도 하다.
떡국, 전, 약과 – 의례와 규범이 깃든 ‘예의의 음식’
명절 음식은 맛보다 의미로 먹는 음식이었다. 특히 설날의 떡국은 시간의 순환과 질서를 시각화하는 매개체였다. 흰색 가래떡을 동그랗게 썰어 국에 넣는 과정은 해가 바뀌고, 계절이 순환하며, 인간의 삶이 또 한 고비를 넘는다는 우주론적 인식을 상징했다. 떡국 한 그릇을 비우면 나이를 한 살 더 먹는다는 개념은 단순한 전통이 아니라, 시간을 체화하는 민속적 의례였다.
전은 또 다른 차원의 상징이다. 고기, 생선, 채소 등 모든 식재료를 얇게 썰고, 밀가루와 계란물을 입혀 노릇하게 지져내는 ‘전 부치기’는 명절의 핵심 노동이자 사회적 연대의 공간이었다. 주방에 모인 가족 구성원들은 저마다 전 하나씩을 책임지며 일을 나누었고, 이를 통해 가족 내 역할과 책임이 자연스럽게 분배되었다. 어른은 육전을 맡고, 아이는 깻잎전을 맡으며, 누구나 자기 몫의 노동을 수행했다.
더불어 약과, 유과, 정과 같은 명절 후식들은 종교적 헌물의 성격도 갖고 있었다. 곡물과 기름, 꿀이라는 귀한 재료를 사용해 만드는 이 후식들은 가장 좋은 재료로 신에게 ‘감사’를 표하는 제물이었다. 정성껏 튀기고, 식히고, 꿀에 재워서 만드는 과정을 통해 인간은 절제와 인내, 절차를 배운다. 결국 명절 음식은 ‘맛’보다 ‘태도’를 가르치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오늘날 떡국은 즉석에서 조리되고, 전은 냉동 코너에서 손쉽게 구매되며, 약과는 대량 생산된 제품으로 대체된다. 음식에서 ‘정성’이라는 요소가 제거되고 ‘시간 단축’이 미덕으로 여겨지면서, 우리는 더 이상 음식에서 인간 관계의 규칙이나 예절을 배우지 않게 되었다. 음식은 교육의 도구였고, 정서의 매개였으며, 공동체의 규범을 전달하는 수단이었다. 이 모든 것이 사라진 자리에 남은 것은 단순한 소비 행위뿐이다.
전통은 박물관에 보존된 유물이 아니다. 그것은 매년 반복되는 실천을 통해, 사람들 사이의 감정과 손끝을 통해 살아 움직이는 것이다. 명절 음식은 그래서 단지 ‘과거의 맛’이 아니라, 현재의 삶을 되돌아보게 하는 거울이다. 우리가 떡국을 끓이지 않는 이유, 송편을 빚지 않는 이유, 나물을 고르지 않는 이유는 결국 우리가 더 이상 ‘누군가와 함께’ 시간을 보내려 하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음식을 잊는다는 것은 그 음식이 지니고 있던 ‘태도’와 ‘관계’를 잊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곧 문화의 단절이다. 이제는 명절 음식을 단지 재현하는 것을 넘어서, 그 안에 깃든 정신과 질서를 되새겨야 할 시점이다. 다음 명절, 한 조각의 송편을 직접 빚고, 전을 부치며, 나물의 쌉쌀한 맛을 음미해보자. 그 안에 우리 삶의 뿌리가 있고, 잊혀진 전통이 조용히 되살아날 것이다.